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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E: 넌> 2021 프로젝트 보기/칼럼, 좌담

아주 순수한 공놀이 - 유이우

2021. 11. 28.

아주 순수한 공놀이


글쓴이 : 유이우(시를 쓴다. 공놀이를 좋아한다.)

 

 

올가을 친구들과 배드민턴 대회를 열었다. 건강해지려는 목적은 전혀 아니었고, 우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연한 일이었다 치기엔 오래전부터 어렴풋이 자발적 운동회에 대한 로망을 가슴 속에 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배드민턴이었냐고 누군가 물어보면, 그건 정말로 우연이라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다.

 

 나는 주로 내가 사는 동네에 있는 구민체육선터 앞 체육공원에서 음악이 나오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트랙을 돌면서 자전거를 탄다. 물론 이것 또한 건강해지기 위한 목적은 아니고, 자전거를 타고 바깥 공기를 풀어헤쳐가며 듣는 음악의 순간은 어떤 날들 속에서 잃어버린 내 기분을 무엇보다 잘 되찾게끔 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트랙을 돌고 돌며 찾아오는 그 감정에 위로를 받는다. 그저 바퀴를 굴리고 굴리면, 음악이 나에게 완전히 집중하고, 어루만져주는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그 행위는 조금 쓸쓸하기도 하다.

 

 여느 때와 같이 자전거를 타고 트랙을 돌던 어느 날, 나는 동네 사람들이 배드민턴 치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이 어떤 내기를 했을 수도 있겠지만 배드민턴을 치는 행위는 자전거를 타고 순간을 지나는 내 눈에 아무런 이유도 느껴지지 않는 아름다움이었다. 나는 그날 집으로 돌아와 쿠팡으로 당장 배드민턴 채를 주문했다. 늘 혼자였던 자전거에서 내려와 두 명 이상이 되어야 칠 수 있는, 배드민턴이라는 공기에 포함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거의 충동적이었고, 주문을 하면서도 충동적으로 친구들과 대진표를 짜야겠다 생각했다. 그리하여 우연이 만들어낸 생각의 연쇄작용에 의해, 또는 앞서 언급했던 어렴풋한 로망에 의해,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 아름다운 ‘놀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 나는 내 이름과 친구 일곱 명의 이름이 들어간 대진표를 짜게 되었다.

 

 배드민턴 대회명은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로 정했다. 일반적인 토너먼트와 다른 점이 있는데, 최종 승자와 최종 패자가 마지막에 한 번 더 경기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최종 패자는 최최종 승자에게 편지를 써야 한다는 것. 그것이 이 대회의 특이점이었다. 어쩌면 기적이 일어나 최종 패자가 최종 승자를 이기고 편지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다소 엉뚱한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들은 내 머릿속에서만 나온 게 아니고 친구들과의 전화 통화에서, 또 함께 거리를 걸으며 했던 말들이 밀물처럼 다가와 썰물로 다시 떠날 때, 모래 위에 남겨주고 간 반짝이는 돌멩이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저 그 돌멩이를 가볍게 집어 들었다. 다 큰 성인들이 모여 편지를 받으려고, 또는 편지를 쓰지 않으려고 경기를 한다. 상금 같은 것도 없다. 그냥 모여서 재밌는 공놀이를 하는 것. 그렇게 성인남녀들이 모여 술을 먹지 않고 편지를 위해 운동을 하는 꽤 아름다운 가을 운동회가 시작되었다.

 

 여차저차 장난스럽게 시작했지만, 경기는 점점 더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나는 삼각대까지 빌려 인스타 라이브로 경기를 중계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생각이 신나고 재밌는 방향으로 더해갔다.

 

 처음엔 참가자 공개 모집을 했었는데 일면식도 없는 사이가 쑥스러운지 내가 모르는 그 누구도 먼저 참가하겠다 말하지 않아서, 결국 내 지인들로만 경기를 꾸려가게 되었다. 경기에 참여한 내 친구들은 다양한 인물이었다. 시인도 있고, 전직 축구선수도 있었으며, 퍼포머도 있고, 그래픽 디자이너도 있었다. 친한 친구, 동네 지인들로 이루어졌기에, 나의 바운더리 안의 사람들은 결국 다 나와 닮은 문화예술인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 대회는 문화예술인이 개최한 문화예술계 배드민턴 대회인 셈이었다.

 

 이 배드민턴 대회를 정말로 문화예술계에서 주최한 배드민턴 대회라고 생각해보자. 이 대회에 위계가 있나? 없다. 이 대회 참가자들은 나이가 다 다른데도 서로를 부를 때 존칭을 쓰지 않고 이름만 부른다. 이 대회에 불평등이 있나? 없다. 공정하게 대진표를 짜고 함께 의견을 물어 진행 방향을 잡았다. 남녀 구분에 대한 제약이 있나? 없다. 남자와 남자가 붙기도 하고, 여자와 여자가 붙기도 하고, 남자와 여자가 붙기도 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결국 이길 거라는 뻔한 경기 결과에 기대지 않음으로 모든 참가자들은 경기가 열리는 순간 땀을 흘리며 승리하기 위해 집중한다. 경기 내내 그냥 살아 숨 쉬는 것이다. 이 경기 안에서는 어떠한 인간관계도 작용하지 않으므로, 특정적으로 자신이 이기면 안 되는 사람과, 이겨도 되는 사람이 없다. 그냥 열과 성을 다해 배드민턴 채를 한껏 휘두르며 즐기는 것이다.

 

 기민한 사람이라면 문화예술계의 성평등 탈위계 문화조성 사업에서 예술가와 건강이라는 주제를 등에 업고도 내가 배드민턴 얘기만 하고 있는 까닭을 눈치챘을 것이다. 문화예술은 본래, 놀이다. 그러므로 문화예술이라는 ‘놀이’가 그 내부자들 안에서 권력이라는 힘을 가지지 않았으면 한다. 예술을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그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권력과 위계를 따져 제 위치의 것만을 내세워 부릴 것이다. 예술 작품을 발표하고 문화예술계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빨려 들어온 한 예술가 그 자신이 그의 예술에 대한 최초의 마음처럼, 순수하게 배드민턴 치듯이, 이 판에 뛰어들어 받을 수 있는 것이 겨우 글씨가 쓰인 몇 장의 아름다운 편지뿐이라는 듯 뛰어놀 수 있다면 좋겠다. 나는 그렇게 노는 게 이 판에 있는 모두가 최선으로 잘해나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 안에서 뭘 얻으려 하지 말고, 그 자체로 예술을 더 재미있게 아꼈으면 좋겠다. 이 판의 모든 슬픔은, 본래 예술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예술계 사람들이 서로에게 특정 위치를 내세워 눈치를 주지 않으며, 억압하지 않고, 자신이 속한 예술계 속에서 예술이라는 장을 잘 놀아났으면 좋겠다. 그러다 보면 한 데 어울려 더 좋은 것들을, 서로를 해치지 않는 순수한 힘으로 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 배드민턴 대회를 통해, 조금 덜 외로워졌고, 뜻밖에 건강해졌다. 친구들과도 더 돈독해진 기분이다. 내 친구들은 왜 죄다 예술가들일까? 그리고 왜 다들 가난할까. 왜 아플까. 예술계는 왜 슬픈 위계질서 속에 있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아무런 관계 설정도 없이, 예술이라는 제3의 성으로, 예술인이 아닌 예술 그 자체의 위계로 이 판이 진행되면 안 되는 걸까. 사람 사는 곳에 그런 게 어디 있냐고 말하면 나는 이 판에 등을 돌리고 토라진 아이 같은 기분이 된다.

 

 나의 이러한 마음은 마냥 맑고, 두루뭉술하다. 그런데 배드민턴 대회 또한 두루뭉술하게 시작해서 서서히 친구들의 의견을 모아 진지하게 라이브 중계까지 하게 된 게 아닌가. 일단은 그렇게 가보는 것이다. 당연한 목소리들이 많다. 권리를 찾기 위해,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개인인 누군가와 누군가들은 계속 어디론가 가고 있다. 계속 그렇게 조금씩 나아가 문화 예술계 사람들이 언젠가 진정으로 웃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배드민턴 대회 바깥에서도, 나와 내 친구들이, 내 친구들을 닮은 그 누군가들이 그 안에서 아무런 차별 없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순수하게 나아가면 의도치 않아도 저절로 건강해지는 것이다. 내가 자전거 안장 위에 혼자 있다가 땅을 딛고 다른 누군가와 함께 배드민턴을 치듯이. 신나게 땀을 흘리듯이. 내 어렴풋하고 오래된 가을 운동회 로망의 실현처럼, 여기 이곳에서 경직되어 말하지 않아도 모두 웃으며 함께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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