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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의 대중문화와 참여의 의미 - 정지우

2021. 10. 27.

새로운 시대의 대중문화와 참여의 의미


글쓴이: 정지우(문화평론가,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저자)

 

 

최근 미디어환경이 급변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과거 일방적인 공중파 TV 송출이나, 신문 발행, 그밖의 각종 문자와 영상 매체가 지금과 달랐던 가장 중요한 지점은 ‘일방향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모든 매체가 쌍방향성 속으로 깊이 들어왔다. 유튜브 등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영상 송출에 달리는 실시간 채팅들, 뉴스마다 달리는 댓글들, 그 외에도 여러 SNS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다양한 콘텐츠에 대해 범람하는 평가들은 쌍방향 시대를 확고히 증언하고 있다.

 

그래서 생산자들이 가장 신경쓰는 것이 과거에는 정부 위원회의 검열이나 유력 평론가들의 평가 같은 것이었다면, 이제는 거의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대중들의 반응이 되었다. 그에 따라, 문제가 되는 영상은 즉각적으로 사라지거나 수정되고, 곧바로 사과 영상이 올라온다. ‘소비’가 ‘생산’에 그 어느 때보다 더 직접적이고 실시간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단순히 ‘양적’ 측면에서의 소비가 아니라, ‘질적 측면에서의 소비가 영향력의 핵심에 들어섰다. 무언가를 얼마나 보느냐 마느냐보다도, 무언가를 누가 보고 어떤 말들이 전파되느냐가 한 콘텐츠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렇게 생산과 소비는 과거보다 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묶이고 있으며, 시청자나 수용자는 작품 그 자체의 향방을 결정하고 영향을 미치는 존재들이 되고 있다.

 

그렇기에 미디어가 확산시키는 혐오의 방식이라든지, 여러 권력구조의 문제라는 것도 오로지 ‘생산’의 측면에서만 보기보다는 ‘소비’의 측면에 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가령, 한 작품에 등장한 장애인 혐오적인 장면이 있다고 했을 때, 그 장면 자체를 생산한 생산자의 의도는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 된다. 오히려 수용자들이 그런 장면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이 작품이 우리의 현실을 재현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우리 사회의 문제를 더 확산시키는 방식으로 소비한다면, 그 작품은 ‘훌륭한 재현 작품’이 된다. 반대로, 수용자들이 그런 장면이 과도하거나 문제의식 없이 만들어진 것이라 비판한다면, 그 작품은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형편없는 작품’이 된다.

 

나아가 한 작품의 영향력이라는 것도 생산자의 온전한 의도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다. 어떤 작품이 경력단절여성의 어려운 삶에 대해 보여준다고 했을 때, 이 작품이 사회적인 영향력으로 확산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수용자들이 그녀의 어떤 억척스러운 면을 비난하면서 ‘맘충의 현실’이라고 확산시키는 것이다. 반대로, 수용자들은 그녀의 어려운 삶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여성혐오적인 특성을 보여준다면서 젠더의식의 문제를 확산시킬 수도 있다. 둘 중 어느 방식으로 특정한 작품이 규정되느냐는 결국 생산자가 아니라 수용자들에게 달려 있다. 수용자들이 계속 2차적으로 생산하는 댓글들, 밈들, 포스팅들, 피드들 같은 것들이 결국 한 작품의 성격을 규정짓게 되는 것이다.

 

오징어게임과 인턴기자의 경우

 

최근 장안의 화제가 된 <오징어게임>을 둘러싼 몇 가지 논란들도 살펴볼 수 있다. 초창기에 이 작품은 한미녀 등의 캐릭터가 매우 여성혐오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졌다고 하여, 몇몇 커뮤니티 중심으로 논란이 일었다. 실제로 한미녀라는 캐릭터는 남성들을 모두 ‘오빠’라고 부르면서 생존을 위해 여성으로 대상화된 방식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나아가 성관계 등을 이용한 생존전략은 ‘여성은 창녀 아니면 성녀다’ 같은 가부장적 스토리의 편견을 답습했다고 하여 여성혐오적인 작품으로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 이 작품의 전 세계적인 흥행과 더불어, 세계 각국의 다양한 평가, 우리나라 내에서도 여러 평가들이 공존하면서 이를 여성혐오적 작품으로만 규정할 수 없다는 의견이 퍼지게 된다. 가령, 이 작품에서 비참하게 혹은 비하적으로 그려진 것은 여성만이 아니다. 오히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거의 모든 참가자가 희화화되기도 하고, 그들의 비인격적인 면모들이 드러난다. 많은 이들이 이 작품 속에서 비참하고 비인간적인 입장이 되는 인물들을 보며, 그것이 곧 자기 자신과 다르지 않다고, 이 작품 속 현실이 실제 현실과 다르지 않다며 공감하기도 한다. 즉, 이 작품은 현실을 ‘재현’한 것이므로, 여성혐오나 노인혐오, 배금주의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현실 자체가 그러할 뿐, 작품이 이를 확대재생산하거나 조장하는 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SNL의 <인턴기자>를 둘러싼 논란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이 영상이 지닌 재현성에 공감하는 청년층들도 광범위하게 있었던 반면, 이 영상 자체가 여성혐오적이거나 청년혐오적이라며 비판하는 주장도 적지 않았다. 사실, 처음에는 상당수의 청년 세대가 이 영상에 무척 공감하며 확산되는 게 먼저였고, 이후에 다양한 비판들이 따라오는 수순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을 둘러싼 논의는 현재 ‘매우 재미있고 뛰어난 재현이었지만, 비판의식을 가질 만한 측면도 있다’라는 게 중론으로 보인다.

 

이는 한 작품의 재미와 문제의식이 분리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가 어떤 영상을 매우 재미있게 볼 수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재현이라는 점에서 따라오는 문제의식도 가질 수 있다. 청년으로서 청년 혐오에 대한 인식이 없이 즐겼다 하더라도,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작품 자체가 청년의 입장을 희화한 측면도 있구나, 하고 문제의식을 고민해볼 수 있다. 볼 때는 그저 공감하며 즐겼는데, 돌아보니 여성혐오적인 측면에서 현실적인 비판의식도 지닐 수 있겠구나, 하는 고찰을 더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후자의 영향력이라는 게 얼마든지 더 커질 수도 있는 시대다.

 

한 작품을 둘러싼 평가에는 정답이 없다. 적어도 이 시대에 어느 작품이 도태되어 마땅한 것인가, 확산되며 널리 소비될 가치가 있는가, 라는 것은 모든 수용자들이 그 작품을 대하는 방식에 의해 결정된다. 수용자들은 더 이상 수동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평론가가 된 시대에 걸맞게, 작품 자체를 규정지으며 ‘적극적으로 활약’한다. 실제로 작품 자체가 가지는 영향력보다도,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여 전파시키는가 하는 영향력이 더 강해진 시대가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쌍방향적 시대의 혐오와 차별에 대처하는 방법

 

기존 대중문화를 둘러싼 주요한 문제들은 작품이 현실을 재현하는 방식 자체에 있었다. 생산된 작품들이 역으로 현실을 규정하면서, 현실 속에서 각종 혐오나 차별을 확산시킬 수 있다는 게 핵심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오히려 현실과 작품, 그리고 대중들의 ‘반응’이 있다. 그리고 사회 전반에 더 주요한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작품 그 자체도 규정하는 힘이 바로 대중들의 ‘반응’ 그 자체에 있는 것이다. 생산자에서 수용자 관점으로의 전환, 이것이 앞으로 한 작품을 둘러싼 더 핵심적인 부분이 되어갈 것이다. 또한 혐오나 차별의 확산이라는 것도, 반대로, 인권과 평등의 확산이라는 것도 작품들 그 자체에 달려 있다기 보다는, 작품을 둘러싼 무수한 사람들간의 ‘말들’에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혐오와 차별을 둘러싼 문제란 더 이상 작품 ‘생산자’들에만 있지는 않게 되었다. 오히려 작품을 어떻게 적극적으로 소비하느냐, 나아가 작품으로부터 파생된 말과 논의를 생산하느냐가 혐오와 차별에서 핵심적인 문제가 되었다. 우리는 어느 작품에서든 이 사회의 여러 문제점들을 논의하고, 문제의식을 확산시킬 수 있다. 반면, 어느 작품에서든 이 사회에서 지켜야 할 가치들을 발굴하고, 공감하며, 좋은 의미를 향해갈 수 있다. 우리는 작품을 둘러싼 ‘맥락’을 만드는 참여자들이 되었다. 그리고 그 맥락이야말로 가장 강한 영향력을 지닌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그 맥락에 참여함으로써, 혐오와 차별에 대처하고, 사회를 인식하며, 미래를 고민하고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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