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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E: 넌> 2021 프로젝트 보기/칼럼, 좌담

흉(凶) - 이옥수

2021. 9. 30.

흉(凶)


글쓴이: 이옥수 (유자차스튜디오 / 원더러스트 / D대학교 문예창작과 미투운동 연대발기인)



상처가 아물고 남은 흔적이나 자국을 흉(凶)이라고 한다. 무언가에 베인 피부라도 흉이 남지 않을 수도 있지만, 모기 물린 부위가 흉으로 남기도 한다. 사람에 따라, 체질에 따라 각기 다른 상처가 각기 다른 흉으로 자리한다.


문화예술계의 미투 운동(MeToo Campaign), 특히 지역에서 미투 운동을 다루는 방식이나 바라보는 관점 등을 접할 때 미투 운동을 하나의 정리되지 않은 이슈, 다루고 싶지 않은 이슈 정도로 대하는 것을 보며 이미 아물었다고 생각했던 상처가 흉이 되지 못한 채 다시 툭 터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지역에서 미투 운동을 바라보는 매우 현실적인 측면이라는 생각 또한 든다.

 

2018년, 지방의 D대학교의 문예창작과에서 시작된 미투 사건은 교내에서 발생한 교수의 성폭력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학과 내, 더 나아가 한국 문단의 건강한 발전 방안을 마련하고자 졸업생과 재학생이 함께 연대를 만들어 진행된 것이었다. 이 사건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피해 당시 미성년자였던 피해자가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가해자와 연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부부간, 연인 간에도 성관계에 동의하지 않으면 성폭력이라는 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나 당시 관련 뉴스 기사에 달리는 댓글에는 '연인 사이에 성폭력이 말이 되냐'는 식의 2차 가해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대다수의 미투 사건은 피해자가 사과를 받는 것으로, 가해자가 해당 조직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우리 연대의 미투 사건 또한 가해자 교수가 강단에서 물러나는 것과 학과 내에 성희롱․성폭력 규정을 만드는 것으로 끝났다. 대부분의 미투 사건이 그러하듯 가해자를 법정에 세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며, 가해자가 사과하고 이후에 발생할 수도 있는 추가적인 가해를 멈추게 하는 것으로 끝이 난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시작은 그 후였다. 연대는 본 미투 사건 자체를 어떻게 바라보고 앞으로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갈 것인가에 관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젠더 감수성 자체가 부족한 공동체를 위해 학과 내에 인권․페미니즘 문고를 만들었다. 그리고 한국 문단이 가지고 있는, 구조에서 발생하는 위계에 의한 폭력을 어떻게 수면으로 끌어올리고 이를 해체할 것인지에 관해 고민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우리가 꾸준히 해오던 ‘글’이었다. 사회의 일원으로 회사원, 엄마, 작가, 학생 등으로 살아온 연대의 조직원들은 우리가 그동안 강요받아왔던 사회적 책무, 위계에서 발생한 폭력에 순응하지 않고 그만두는 것을 선언하는 소설과 시를 창작하여 단편집을 만들기로 했다. 이 책은 지방의 모 기관에서 청년을 지원하는 사업에 선정되어 펴낼 수 있었으며 이후 이 책의 인세와 판매 수익금은 모두 한국여성민우회에 기부하였다.


우리는 이렇게 문화예술계의 미투 운동을 예술로 풀어내어 미투 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고 믿었다. 그러나 다음 해에 우리는 또 다른 장벽을 마주하게 되었다. 책을 출판할 수 있게 지원해주었던 기관에 다른 아이템으로 지원사업을 신청하였고, 해당 사업의 발표심사장에서 책과 관련된 참담한 현실을 보았다. 출판한 책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법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사안을 다루지 말라는 의견과 사회적 이슈로 예민한 것을 하지 말라는 직접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문화예술계의 낮은 젠더 감수성에 한탄했었지만, 그 후 지역에서 발생한 또 하나의 가해 앞에서 무기력함을 느꼈다. 이는 가해자를 직접적으로 옹호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는 방조하고 있으며 2차 가해에 자신도 모르게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후 성평등 언어 가이드를 만들어 지역 내에 배포하였고, 여성들과 함께하는 컨퍼런스를 개최하였으며, 충청권 문화예술계의 성평등 실태를 아카이빙하는 등 다양하게 활동을 펼쳤지만, 여전히 한계를 느끼고 있다. 그 한계는 지방의 기관이 여전히 젠더 평등 활동을 하는 이들이 말하는 ‘젠더’라는 단어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그 반대에 서 있는 이들에게는 이 ‘젠더’ 문제를 매우 너그럽게 대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수도권에서 미투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되어 사과했던 한 예술기획자가 도망치듯 지방으로 내려와 지원사업을 받으며 활동하고 있다. 문화예술계의 지원사업을 신청할 때, 성희롱․성폭력 예방에 관한 서약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누구나 지원사업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투 사건의 가해자이지만 수도권에서 활동하다가 지방에 왔기 때문에 환영받는 예술기획자, 그리고 미투 운동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활동에 제약을 받는 예술기획자, 기존의 상처가 흉이 되기도 전에 또 하나의 상처가 생기는 현실이다.


우리가 강력하지 않다는 것을 수많은 경험을 통해 학습했다. 그러나 우리는 수없는 흉을 만들더라도 꾸준히 오래 이 견고해 보이는 벽을 부수기 위해 나아가고자 한다. 방해하는 요소들이 있더라도 지금의 우리처럼 꾸준하고 부끄럽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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