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ONE: 넌> 2021 프로젝트 보기/칼럼, 좌담

둘 다이지만 아무것도 아닌 말, 완전히 나의 것은 아닌 그런 말 : 『예의 있는 반말』에 관한 짧은 리뷰 - 정동규

2021. 10. 27.

둘 다이지만 아무것도 아닌 말, 완전히 나의 것은 아닌 그런 말
: 『예의 있는 반말』에 관한 짧은 리뷰


글쓴이: 정동규(『예의 있는 반말』 프로젝트 기획자)

 

 

"한국 사회에 강하게 남아 있는 차별과 억압의 근본적 원인은
'존댓말'과 '반말'로 이루어진 '존비어 체계'에 있습니다."[1]

 

 

한국에는 오랜 시간 동안 변한 적 없었던 두 유행이 있다. ‘존댓말’과 ‘반말’이라는 유행. 이 유행을 만들었던 누군가를 특정할 수도 없을 뿐더러, 어쩌다 존댓말과 반말이 보편적인 말이 되었는지 크게 궁금해하지 않은 채 한국말을 자기 자신의 말로 사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 유행을 따른다. 우리는 알 수 없는 누군가의 견해 속에서, 그들이 만들어놓은 유행과 구조하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유령’의 집에 머물며 말을 하면서 문화를 알아보고, 나를 알아보고, 너를 알아본다.

 

최근 들어 위계질서의 문제를 지적하며 많은 사람들은 존댓말과 반말에 그 책임을 묻기 시작했다. 그래서, 둘은 살아남기 위해 나름의 근거를 바탕으로 서로를 비난하고 평가절하한다. 존댓말은 ‘예의와 존중’이라는 명목 아래 반말을 비난하고, 반말은 ‘평등과 친밀’을 근거 삼아 존댓말을 평가절하한다. 누군가는 존댓말만 사용하자고 하고, 또 누군가는 반말만 사용하자고 한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를 제거하고,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만이 우리 앞에 놓인 것일까?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지금의 말을 미래가 있는 방향으로 재정의함으로써 우리 삶의 존재 조건 자체를 변화시킬 수는 없을까? 우리가 사용해왔던 말이 그저 하나의 유행이었다면, 지금까지의 유행과는 다른 새로운 유행을 우리의 세계로 끌어올 수도 있지 않을까?

 

『예의 있는 반말(도서미리보기)』에는 ‘평어’라는 새로운 말을 디자인해 사용하고 있는 디자인 커뮤니티 디학(디자인학교)의 열다섯 필진이 쓴 글이 담겨 있다.

 

평어는 “연두, 고마워”, “천만에, 성민”과 같이 직접적으로 친밀하게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지만 ‘~야’, ‘~씨’ 같은 토씨를 사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래서 상호 존댓말처럼 어느 정도의 존중감이 느껴지는 반말을 쓰는 형식으로 설계된 말이다.

 

디학의 친구들은 1~2년간 새로운 대화체계로 소통하며 느꼈던, 명징한 언어로 규명할 수 없는 어떤 감정들과 디학이라는 일상의 현장에서 벌어졌던 만남의 구체성을 각자의 방식으로 호출하고 기록해보기로 했다.

 

지면에 글자를 채워나가는 과정에서, 여태까지 학교에서 진행되었던 다른 글쓰기 프로젝트와 달리 많은 친구들은 글쓰기에 난항을 겪었다. 우리가 처했었던 어려움만큼이나 평어는 우리로 하여금 더 실수하고, 더 많이 엇나가기를 요청했다. 다른 세계를 만나러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세계를 열어야 하는 위험을 내기에 걸어야 하기에, 물어도 물어도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는 느낌을 품은 채 불확실한 지점에서 부단히 헤맸다. 완전히 우리의 것은 아닌 그런 말에 의해 우리는 지금까지 확신을 가지고 걸어왔던 길에서 갑자기 방향을 상실하게 되었다.

 

하지만, 헤맴과 상실의 또 다른 이름은 ‘책임’이기도 하다. 책임은 확고하고 안정된 가치의 부재 속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말’과의 관계 앞에서 수동적으로 대응해왔다. 새로운 유행을 이끄는 새로운 말은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죽이고 우리의 일상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유령의 집에서 벗어나기를,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극적으로 바꿀 수 있도록 능동적인 힘을 끝없이 개발하기를 요구한다.

 

말로 하는 모험은 이제서야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앞으로 더 많은 모험이, 더 많은 말들이 발명됨과 동시에 끝없이 개정되고 교정되면서 어딘가로 나아갈 것이다. 우리에겐 더 많은 언어가 필요하다.

 

평어는 반말의 친밀감과 존댓말의 예의라는 특성을 모두 지녔기에 둘 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존댓말과 반말의 이항대립 양극 그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는, 둘 다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그런 말이다. 평어라는 말을 매개해 우리의 만남을 기억하고, 서로를 알아보고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존댓말과 반말이라는 ‘유령’ 같은 말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유령이 만들어 놓은 삶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유령의 언어 안에서 발생하는 반복의 과정이라면, 우리는 삶을 다른 방식으로 반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행동, 규칙, 습관에 대한 일련의 규범들은 기원을 파악할 수 없는 복제물들의 인용이고 재생산이다. 어떠한 규범도 그것이 끊임없이 반복되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세계에 충실히 존재하는 건 아니다. 규범의 의미는 계속해서 반복되고 인용되면서 지연되어 완결되지 못한다.

 

‘평어’라는 온전히 나의 것은 아닌 것 같은 말을 경유해 삶과 관계에 대해 말하는 열일곱 편의 글은 우리가 당연하게 써왔던 말로 인해 이제껏 무엇을 놓쳐왔고 또 무엇에 그렇게 사로잡혀왔었는지, 그래서 도래할 삶의 시간과 공간에 어떤 가치들이 새로 포함될 수 있는지를 어렴풋이 묻고 있다.

 

『예의 있는 반말』을 읽을 독자들이 우리가 당연히 사용해왔던 말들을 새롭고 다른 방식으로 읽게 될 것을 기대하게 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가하는 차별과 평가절하 그 자체를 의심하게 되고, 그런 억압의 합법성과 일련의 일관성에 의문을 품게 되고, 그것이 일종의 불법적인 힘에 의해 유지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바로 그곳에서부터 탈위계의 감각이, 우리가 제대로 경험해본 적이 없지만 찰나의 흔적으로 느껴만 왔던 놀라운 감각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곳에 비로소 도래할 수 있지는 않을까?

 

 

[1] 유석재, "한국사회 차별·억압 원인은 존비어 때문", 조선일보, 2005년 5월 16일.


디학(디자인학교)

“사람 사이 관계에서 삶과 배움을 찾으며, 그 안에서 교육의 본질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커뮤니티”를 지향하는 디자인 대안학교. 나이, 성별, 직업 등과 관계없이 세상을 이해하는 수단으로서 디자인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교유하고 있다.

 

글쓴이 정동규

전북대학교에서 에너지공학과 사회학을, 디자인 대안학교인 디학에서 디자인을 공부했고 지금은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미학을 공부하고 있다. 기어이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인간의 감수성과 그것을 추동하는 존재의 힘을 지금의 미학적 문제로 삼고 있으며 당장의 질문에 응답하는 예술, 도래할 세계를 요청하고 끌어오는 예술, 새로운 시공을 향한 동세가 기입된 예술에 대해 생각하며 글을 쓰기도 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