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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E:넌 무엇을?/[기획포럼] 역동하는 성평등, 자가당착의 오류

[이지영] 리뷰 2. 역동하는 성평등, 자가당착의 오류 기획포럼 그 이후..

2023. 1. 3.

 

역동하는 성평등, 자가당착의 오류 기획포럼 그 이후..

 

이지영(한국예술인복지재단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 전문강사)

 

 

제목 수정에서부터 난항을 겪었던 ‘역동하는 성평등, 자가당착의 오류’ 기획포럼을 잘 마무리하였다. 신청했었던 참여자들이 더 많이 왔으면 하는 약간의 아쉬움이 들기도 했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확신이 드는 포럼이었다. 

 

먼저 신현정 문화기획자이자 포럼 모더레이터의 기조 발제문인 ‘역동하는 성평등: 부수고 짓고 허물기’로 기획포럼의 포문을 열었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신현정 기획자가 '21년 <NONE:넌> 사업 참여자로서 이 기획포럼의 주체인 운영단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야기를 정리해 온 부분이었다. 우선, ‘NONE:넌’ 사업에 참여하면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약속문이었다고 한다. 약속문에 적혀 있는 내용들, 예를 들자면 서로에 대한 혐오나 비하 발언을 하지 않고 존중한다는, 어떻게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문구들이 언어화되면서 가지는 효력 또는 각성의 효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사실 나는 성희롱·성폭력 예방 교육 강사이기 때문에 예술단체에 자치 규약이나 생활 수칙을 정해보게 하는 것에 익숙하지만 만약 이런 약속문을 처음 본다면 당연하지만 문서화되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의 강력한 이질감, 또는 생소함을 느꼈으리라 짐작되었다. 이러한 약속문은 분명한 효력을 가지지만 또한 누군가에게 엄벌주의나 엄숙주의로 다가오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약속이 깨어지면 누군가는 처벌받게 되고 또 누군가는 처벌의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현정 기획자가 짚어 준 이러한 부분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커뮤니티가 엄벌주의나 엄숙주의에 갇히지 않고 자유로운 커먼즈가 되는 더 효과적인 방법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는 부분이라 흥미로웠다. 또 자율예산분배제에 언급한 부분도 이번 <NONE:넌> 사업 참여자로서 지나왔던 과정이기 때문에 관심 있게 들을 수 있었다. 경쟁 관계에 있는 동료들끼리 다른 팀의 예산이나 계획을 듣고 이의를 제기하거나 질문을 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가 없으면 예기치 못한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지적에 깊이 공감하였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란, 서로에 대한 비방이나 혐오성 발언을 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상황이 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너무나 바쁜 사회를 살고 있기 때문에 치밀하고 민주적인 구조를 만들고 이야기를 발화하는 것을 이어가는 실천에 쓸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언급은 정말 우리의 상황을 제대로 진단한 말이라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느낌이었다.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할 수 없는 사회, 누구나 자의든 타의든 멀티 플레이어가 되어야 하고 다양한 정체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시대에 우리 옆 산재해 있는 불합리,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야 할 더 나은 방향에 대해 계속, 지치지 않고, 발화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기조 발제 말미에는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우리의 이야기를 확장시킬 수 있는 힘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나도 모를 고민에 빠져들었다. 


첫 발제는 신효진 독립기획자이자 한국 퀴어 영화제 집행위원장의 ‘성평등 문화정책 퀴어링하기’ 였다.

신효진 기획자는 우리 사회가 너무나 당연하게 쓰고 있는, 성희롱·성폭력 강사인 나조차도 때때로 생략하고 이야기하는, 양성 안에 포함되지 않는 성 소수자들의 권익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정부에서도 양성평등에 대한 강조와 정책들만 이어가다 ‘문화비전 2030’ 제정에 있어서는 문제점을 인지하고 성 소수자의 존재를 정책으로 포용하려는 작은 제스처를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모두를 위한‘ 문화정책은 이제 시작 단계일 뿐이다. 간성, 트랜스젠더, 논 바이너리 및 젠더 퀴어의 존재를 거세시키는 양성평등이 아닌 기울어진 문제에 집중한 더 많은 성 평등한 문화정책은 이제부터 만들어 가야 하는 우리의 숙제이다.

 

여전히 퀴어 예술가, 퀴어 예술 자체에 대한 인식이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사실 ‘퀴어하다’는 것은 기존의 장르와 형식 또는 제도권에 갇히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랬을 때 발생하는 '보호받지 못함'의 부분들이 분명히 또 존재한다. 예를 들어, 예술인 증명이 힘들다는 것이 그러한 단적인 예이다. 예술인 증명은 예술인으로 보호받기 위한 기본적인 증명 절차인데 퀴어 예술인 또는 퀴어 예술을 하는 예술인들은 일단 이 기본적인 증명 절차에서부터 막히는 상황들이 발생하게 된다. 이 부분은 나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은 부분이라 반성하게 되었다. 퀴어 정체성을 가진, 또는 퀴어한 예술을 지향하는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동시대에서 예술을 하는 우리 대부분은 하나의 프레임이나 정체성으로 수렴되기 힘든 다양한 활동들을 하며 살아간다. 사회적 현안에 활동가로 참여하기도 하고, 예술 외에 직업을 병행하기도 한다. 이렇듯 다양한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가들을 획일화해서 증명의 과정을 거치게 하는 것이 언제까지 유효할 수 있을지에 대한 근원적 의문이 들었다. 행정상의 편의, 기존에 활동증명을 마친 예술인들의 권익 보호를 명목으로 하고 있지만 이렇듯 획일화되고 고압적인 구분이 어떤 예술가들에게는 예술을 지탱할 마지막 힘마저 뺏어버릴 수 있다는 점에도 이제는 주목해야 한다.    

 

앞서 발제도 그랬지만 특히 사랑해님의 발제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사랑해 님이 겪은 사례는 분명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행한 사상검열,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로 읽혔다. 사랑해 님 포함 세 명의 작가는 어느 페미니즘예술제에서 선정된 이후 해당 작가들의 발언 또는 표현을 주최 측이 문제 삼아 배제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과정들이었고 사랑해 님을 포함한 세 작가는 어떻게든 주최 측과 봉합의 실마리를 찾아보려 했으나 결국은 위계적이고 수직적인 관의 결정으로 폭력적인 전시 하차를 당하게 된다. 
과정을 자세하게 들어보니 분명 이분법적인 진영논리로 작가들을 편 가르기 하고 작가들의 사상을 검열하려고 시도했음이 분명한데 작가들은 끝까지 보호받지 못했다. 모든 항의의 과정은 작가들 스스로가 찾아낸 것이다. 같은 예술가로서 그 과정을 듣는 것 자체가 힘들 만큼 그 과정은 지난했고 부당했다. 작가님들의 깊은 내상이 걱정되었다. 페미니즘이라는 기치로도 또 사랑해님 같은 경우, 계약서라는 안전망에도 불구하고 참여 작가가 부당하게 배제되는 일이 벌어졌으니 ‘우리는 앞으로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실 오늘 성 평등정책의 자가 당착 사례들이 향하는 것은 전부 예술가들을 함부로 규정짓기 하려는 시도에서부터 발생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이든, 국가든 누군가를 함부로 규정지을 수 있다는 생각한다는 것이 굉장히 위험하게 느껴졌고 숨 막혔다. 덧붙여 성평등· 탈위계 정책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정책들이 숨기고 있는 오류들을 분명히 짚어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분의 발제를 듣고 나서 발제자, 토론자, 플로어의 청중들이 다 같이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토론이라기보다는 발제자들의 발제에서 파생된 생각이나 조금 더 추가적으로 듣고 싶은 이야기들을 함께 하는 자리였다. 우선, 사랑해님의 추후 진행 상항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고 신현정 기획자의 서울형 거버넌스와 지역 거버넌스의 온도 차이에 대한 이야기들도 추가로 들을 수 있었다. 듣다 보니 결국은 우리가 계속 발화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야기든 심지어 그 이야기만 가지고 1년 동안 계속 이어지는 릴레이 토론이나 후속 토론이라 할지라도 지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발화해야겠구나.. 그래야 그 이야기들이 결국에는 우리 안에서만 맴돌지 않고 어떠한 확성기를 통해 커지고 공론화되고 결국은 사회도 변화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앞으로 있을 후속 토론이나 모임을 기대하며 기획포럼에 대한 소회를 갈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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