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ONE:넌 무엇을?/[기획포럼] 역동하는 성평등, 자가당착의 오류

[황유택] 포럼 열기 - [신현정] 기조 발제

2022. 12. 27.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입니다.

청년예술청의 다양한 사업 가운데 더 많은 예술인의 안전한 창작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고자 했던  성평등·탈위계 문화조성사업의 일환으로 <NONE:넌> 운영기획단은 역동하는 성평등, 자가당착의 오류라는 기획 포럼을 준비했어요. 사업을 마무리 하면서 성평등 탈위계 정책과 관련한 모순과 허점을 살펴보고 사각지대를 공론해보고자 하는 의도로 기획하였어요.

그럼, 포럼 현장에서 오고 간 의미 있는 이야기를 전해 드릴게요~

 

포럼 열기: ‘21년과 ‘22년 NONE 돌아보기 (황유택)

‘21년 시작한 성평등 탈위계 문화조성사업은 청년예술청 개관 당시의 불거진 Y 사건 이후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의 제안으로 이 사업이 시작됩니다. 지원사업 형태의 NONE, 담론을 확산하는 릴레이 토론회 형식의 확성기 그리고 예술대학을 포함한 다양한 주체가 참여하는 워크숍까지 세 가지 트랙으로 진행된 바 있습니다. ‘22년에 NONE은 이미 관련 주제로 작업을 하는 예술인들의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것에서 개개인이 모여 팀을 이루고 이 이슈로 리서치하고 프로젝트를 직접 기획하는 플랫폼 형태로 변화했습니다. 현장의 움직임 확산에서 임의의 공동체 실험으로 나아가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NONE은 ‘No One Normal Ever’의 약자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없다, 단 한 종류의 정상은 있는 것은 아니다 라는 의미를 전하고자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변화하고 변화를 만드는 것은 바로 ‘너’, 당신이라고 호명하고 싶었습니다.

성평등과 자가당착을 같이 사용한 까닭을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성평등을 제도권 영역 안에서 사업화, 정책화하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모순을 발견하게 되었고, 민간 차원의 역동적인 흐름과 행정이 담지 못한 사각지대가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자 하는 취지로 이 포럼을 준비했습니다.

또한 민에서의 역동성과 달리 관 차원에서는 성평등과 탈위계에 대한 사업이 점차 축소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위기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지속해 성평등하고 탈위계한 문화예술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다시금 상기하기 위한 자리이기도 합니다.

 


기조 발제: 역동하는 성평등: 부수고 짓고 허물기 (신현정 / 문화기획자, 제주평화인권연구소 왓 활동가)

‘왓’은 제주도 방언으로 넓은 들판을 이르는 말입니다. 인권, 평화에 대한 담론을 들판과도 같은 장에서 논의해보자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입니다. 현재 이 인권 단체에서 정책 분야를 다루고 유관 프로젝트 운영을 맡고 있습니다. 저는 2021년 NONE 참여했는데 이는 서울형 거버넌스의 첫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첫 해 사업 참여자이자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예술인으로 느낀 소회 그리고 우리의 위치를 함께 점검하고자 합니다.

 

거버넌스는?

거버넌스는 정부의 정책 방향을 새로운 방식으로 끌어가고자 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직접 관에 정책이나 제도를 제안하고 관의 예산으로 민이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사업을 운영할 수 있는 그런 협력의 방식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민과 관은 순탄하지만 않은 협상을 하게 되죠. 예를 들면 어떤 예산이 대폭 삼각이 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사실 우리는 최종 결재권자인 장의 존재는 알지만, 직접적 의사결정 주체가 누구인지 명확한 개인으로는 드러나지 않아요. 과정을 알 수 없는 상태로 통보만 받는 민은 힘을 모으게 됩니다. 민에 해당하는 개인 혹은 조직은 거버넌스에 속하고 관과 협상을 하는 대표자 격인 셈이죠. 

그렇다면 거버넌스 구성원이 된 민이 과연 정말 개인들의 대표자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 이들은  동시에 더 많은 민의 주체를 설득하고 동원할 수 있는 역할도 해야 합니다. 성평등·탈위계 문화조성사업 역시 더 많은 당사자와 주체, 담론이 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한 중요한 사업 중 하나라고 느꼈습니다.

 

 

‘21년 NONE:넌. 약속문과 규칙을 만들면서 느낀 자가당착

거버넌스 구성원들의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만들기 위한 노력 가운데 한 가지는 약속문을 만들기였어요. 다른 조직에서 이 활동을 했을 때 받은 피드백 중에서 인상적인 것을 하나 소개해 봅니다. 

 

내가 받아들이려면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마치 군대 복무 신조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어요

 

약속문을 들여다보면 ‘하지 않아야 것’을 설정한 부정형 문장이 많습니다. 서로 존중하는 차원에서 긍정으로 나아가려는 방향이 내포되어야 하지만 처음 약속문을 접하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할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로 상당히 큰 감정적 임팩트를 주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규칙인 적 없었던 것을 규칙화 했기 때문입니다. 이 전에는 상호존중 하는 태도와 혐오의 발언을 삼가는 상식을 따로 약속으로 명명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약속문은 이 당연한 것을 언어화하여 실제로 지켜야 하는 규칙으로 존재토록 했으니까요. 다만 이 평등한 문화를 만들자는 약속문이 때로는 외부인에게 진입이 어려운 허들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앞서 군대 복무 신조 같다고 이야기한 분도, 우리가 상호합의 과정을 통해 좋은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데, 왜 처음부터 이런 규칙을 만들어서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애초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는 것인지를 궁금해했던 것이죠.

 

그런 관점에서 약속문 역시 일종의 자가당착이 될 수 있습니다. 공동체 진입에 어려움을 주는 허들을 왜 만드는가에 대한 질문에 부딪히기도 하고, 좋은 의도로 만든 약속이 엄벌주의, 엄숙주의로 작동할 수 있으니까요. 또 이 약속문을 어겼을 때,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누군가는 처벌하는 주체가 되길 요구받기도 합니다. 공동체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이는 공동체 책임으로 보지 않고 처벌의 주체에게 문제의 책임을 지우게 되는 것이죠.  약속문은 공동체 안의 혐오와 차별을 시정하고 나아가 경계할 수 있도록 감수성을 높이는 방향을 더 추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거버넌스는 평가, 심사, 책임과 같은 권력의 주체를 규정하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처음부터 권력은 정해져 있지 않았으며 약속문은 명령이나 법규가 아님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평화를 가져오는 세 가지 요소]
1) 대화 촉진
2) 상호이해를 통한 분쟁의 해결
3) 역동적인 참여 과정의 설계

우리는 이러한 방법으로 협력이라는 친밀하고 민주적인 구조를 만들려고 큰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약속문 같은 것도 사실 그런 장치라고 볼 수 있어요. 다만 ‘구조’ 만들기에 많은 에너지를 쏟은 나머지 공론장에서 나온 이야기를 발전시키고 실천으로 이어나갈  힘이 부족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또 협력의 과정에서 생기는 충돌을 지나치게 경계하다 보니 협력 자체를 두려워하게 된 것은 아닐까? 오히려 서로 다투고 소리 지르고 울고 웃는 과정에서 공동체 안에서 이해가 교차하고 협력이 가능해지는 것은 아닐까? 협력 자체의 자가당착도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성평등과 탈위계 같은 정책의 언어를 계속해서 부수고 새로 짓고 허무는 과정을 반복해야 우리가 나아갈 새로운 세계의 모양도 잡힐 것입니다. 모두가 약속에 얽매이고, 바쁘고 지쳐있으며 힘듭니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까지 나아왔는지, 누굴 만나 무얼 하는 자체가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무언가를 괄목할만한 것을 당장 하자는 것보다 우리가 어디까지 있는지 돌아보고 성취한 바를 경험을 공유하는 장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그다음 스텝을 이야기 나눌 있을 테니까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