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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E:넌 무엇을?/[기획포럼] 역동하는 성평등, 자가당착의 오류

[김유진] 리뷰 1. 정확하고 섬세하게 개념을 세워야 하는 모멘트

2023. 1. 3.

정확하고 섬세하게 개념을 세워야 하는 모멘트

 

김유진(문화기획자)

 

안의 상황
성평등·탈위계 문화조성 사업은 내게 늘 어렵다. 올해는 성평등·탈위계 문화조성 ‘플랫폼’ 사업이 되었다고 한다. 여전히 어렵다. 헌데, 내게 이 사업이 어려운 이유는 ‘문화조성’, ‘사업’, ‘플랫폼’과 같은 사업적 개념 때문이 아니다. 나는 ‘성평등’과 ‘탈위계’가 몹시 어렵고, 알아갈수록 더욱 어렵다. 아마도 이 문제가 전문가의 시선에서 거리를 두고 조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 것 같다. 
날 때부터 여성으로서 사회적 얼굴을 부여받아 살아왔고, 소수자 지인들의 삶을 지켜봐 왔다. 당사자성이 이렇게 짙은 문제에서는 말끔하게 정리된 ‘관념’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울퉁불퉁하고 미세한 실체의 조각들이 몹시 신경 쓰이기 마련이다.
그래서인가. 미투 이후 급격하게 하나로 뭉쳐서 불타올랐던 에너지 덩어리가 최근 빠르게 세부적인 입장별로 부서지고 있다고 느낀다. 나는 이 부서짐을 각자 입장에서 실체의 조각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몸부림의 결과로 해석한다. 흩어지는 연대의 동력을 붙잡기 위해 ‘교차성’ 같은 개념이 도입되기도 하지만 힘에 부친다는 느낌도 든다.

바깥의 상황
아래쪽의 흐름 - 활동의 내부는 쪼개지고 있는데, 위쪽의 흐름 - 국가 아젠다는 ‘정상성’을 향해 더욱 가열차게 달려가고 있는 듯하다. 예를 들자면, ‘여성가족부’를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로 바꾼다는 것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는 여성가족부보다도 후퇴한 부서명이라고 생각한다. 여성가족부는 여성을 가족과 돌봄의 경계 안에 가두는 한계가 뚜렷하지만, 동시에 현실적인 여성들의 처지를 반영하고 해결하려는 의지 또한 포함한 부서명이다. 반면,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는 구체적인 사업의 대상을 지정하지 않고, ‘인구’, ‘가족’, ‘양성평등’이라는 추상적 개념들을 접붙여 부서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가족’의 경우 여성가족부에서는 여성과 붙어 구체적인 사업의 대상으로 인지되지만,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에서는 인구와 양성평등 사이에 놓여있어 이 둘과 동등하게 추상적 개념으로 이해된다.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라는 이름은 해당 부서가 지향해야 할 이데올로기적 목표를 명시적으로 표방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인구와 가족과 양성평등 사이의 상관성을 생각한다면, 이 본부 명칭이 노리는 과녁은 아마도 ‘남녀가 서로 존중하며 짝을 맺고 아이를 낳아 국가의 인구를 늘리는 데 공헌한다.’이지 않을까? 압축해 말하자면, 결국 국가 인구 관리를 위해 ‘정상 가족’이 필요하다는 뜻 같다. 국가를 위해 개인을 도구화하는 전형적인 접근이고, 개개인의 개별성을 존중하자는 성평등의 지향성과는 백만 광년 떨어진, 낡은 패러다임이기도 하다. 

혼란 속에서 할 일
아래는 흩어지고, 위는 반동의 물결에 올라탄 상황이니 많은 사람들이 무력하거나 혼란할 것이다. 이런 시기에 성평등·탈위계 문화조성 플랫폼에서 만들어낸 참여자들의 프로젝트를 보면 반짝거린다는 느낌을 받는다. 동시에, 이런 활동이 앞으로 과연 지속될 수 있을지, 거버넌스 운영단의 어려움이 더욱 커진 건 아닐지 걱정도 된다.
개인적으로 상황이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갈 때 가장 힘든 점은 정체 모를 적개심이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솟아오른다는 것이다. 나를 포함해 이 적개심의 함정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혼란은 사람들의 경계심을 자극하고 날이 서게 만든다. 이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당연한 현상인데, 모두가 다 날이 서 있으니 사회적으로는 갈등이 첨예해질 수밖에 없다. 어떤 말을 해도 건설적인 대안보다는 뾰족하고 방어적인 공방 앞에 서게 될 때, 사람들은 침묵에 빠진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하면 허무함에 빠지지 않고, 성평등이라는 지향을 향해 지속적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가 최근 나의 주요한 고민이다. 

 


이번 포럼 제목이 <역동하는 성평등, 자가당착의 오류>인 것은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 때문에 생겨난 거버넌스 운영단의 고민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싶다. 신현정 모더레이터의 기조 발제뿐 아니라, 신효진 기획자님, 사랑해 예술가님 발제 내용 모두에서 혼란스럽거나, 역행하거나, 파편화된 현장의 흐름을 느꼈다. 동시에 어려운 흐름 속에서도 각자 방법은 다르지만, 강단 있게 성평등의 방향을 추진해나가려는 개인들의 의지가 느껴졌다. 


나의 경우, 혼란을 거두기 위한 노력으로 되도록 ‘정확한 표현’, ‘정확한 방법’들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본 포럼에서도 이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토론을 진행하였다. 예를 들어, 본 포럼의 제목에 대해 왜 성평등에 자가당착을 붙이는지에 관한 문의가 있다고 들었다. ‘역동하는 성평등’의 주체는 ‘현장’이고, ‘자가당착의 오류’의 주체는 ‘정책’인데 주어를 생략했기 때문에 자가당착의 주어가 성평등으로 읽히는 오해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제3회 페미니즘예술제’에서 일어났던 참여 작가 전시 배제 사건도 그 전말을 들어보면 해당 공모를 진행한 기관에서 ‘작가’와 ‘용역’에 대한 개념을 정확히 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많은 행정 사업들이 ‘기획’의 이름으로 ‘작가’들을 공모해 ‘용역 사업’을 지시하는데 이처럼 지시하는 언어와 실제 내용이 다른 경우에 대해 우리는 우선 오도된 개념을 정확히 지적해야 할 것 같다. 
‘차별’이란 개념도 상당히 섬세하게 접근하지 않으면, 모호하게 알고 있음에도 마치 잘 이해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차별’이란 존재의 층위에서 다루어지는 문제이다. 한 사람의 ‘존재’와 ‘입장’과 ‘표현’은 모두 다른 것이다. 입장과 표현들은 협상과 타협의 대상이 될 때가 있다. 그러나 존재는 협상과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모든 존재가 평등하다는 이 약속이 신분제 왕권사회와 민주주의 사회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인 것이다.

이렇게 ‘정확한’에 집착하는 이유는 동일한 사건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공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지평선 위에 놓여있어야 실천적 과제로의 이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러 다양한 의견들을 펼치고 서로 다름을 존중하는 듣기의 과정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실제 개혁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에너지의 집중이 필요한데, 이 에너지를 상명하달이 아닌 수평적 방식으로 모아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작업이 ‘공통의 언어’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포럼에서는 혼자 생각해오던 위와 같은 생각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다른 발제자들도 연대에서 중요한 지점에 관한 각자의 의견을 말씀해주셨는데, 특히 신효진 기획자님이 기회가 닿으면 ‘용서’에 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고 하신 게 인상에 남는다. 나 역시 결국, 이 모든 치열한 분투 끝에는 ‘용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의 용서가 사과할 준비도 되지 않은 가해자를 용서해야 한다거나, 가해자가 사과했으니 그 사과의 대가로 용서를 반드시 해야 한다거나 이런 뜻은 아니다. 궁극적 용서는 오히려 나 자신에 대한 용서일 텐데, 본 포럼의 후속으로 용서에 관한 본격적인 대화의 장이 펼쳐지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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