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ONE: 넌> 2021 프로젝트 보기/워크숍 1차 : 창작윤리

참여자 리뷰 - 정혜정

2021. 10. 27.

글쓴이: 정혜정

불안함이 가득한 연극쟁이
이제 글을 조금 써볼까, 연극 작업을 시작할까 계속해서 두리번거리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동안의 교육과정 속에서 분기에 한 번씩 성교육을 받아왔지만, 미묘하게 강압적인 상황이었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도록 교육을 받아본 적 없다. 연극을 하고 싶다고 다짐했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두려움이었다. 그 두려움은 내가 예술가로서 어떻게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이제 막 연극을 해보겠다고 시작하는 내가 연극 현장에 들어서면 경험할 엄격한 위계질서와 요리조리 피해가는 불편한 성폭력들에 대한 것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이 그저 불안일 뿐이라고, 불안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들에 대한 걱정뿐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불안은 내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위계와 성불평등 속에서 노출되며 만들어진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마치 초식동물이 풀을 뜯고 있는 동안에도 느끼는, 육식동물이 날 잡아먹지 않을까 하는 생존에 대한 예민하고 곤두선 불안인데, 당신은 초식동물에게 육식동물이 잡아먹을 거라는 불안은 확실하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나는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는 연극의 창작과정에 대해선 그런대로 이해도 해보고 사랑하기도 했었다. 너무나도 빈번하게 나타나는 성불평등과 위계질서들을 겪었고, 많은 질문들과 말들이 내 안에서 그득그득했지만 안 그래도 불분명한 연극계 안의 내 미래가 영원히 없어져버릴 것만 같아서 말과 행동을 삼키기 시작했다. 지금은 내가 어떠한 힘도 없으니 일단 버텨내고 힘이 생겼을 때 그 때 뒤집어야지, 라고 생각했었다. 말과 행동을 삼키다 보니 그게 습관이 되었고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나는 예술가에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는다는 것은 예술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게 겁이 났고, 다시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연극으로부터 멀리 떠났다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도 연극을 하면서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무렵에 워크숍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직 갈 길이 멀겠지만, 성평등과 탈위계에 대한 주제로 워크숍이 활성화되기 시작해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워크숍이 연극 대본을 기반으로 한 역할 놀이로 진행되어 참여하고 이해하기 쉽지만 실제 피해를 겪은 사람이 있을 경우엔 참여하기 버거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단계가 더 세분화되어서 피해자를 위한, 분야별, 나이별, 성별에 따라, 혹은 구분을 두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많은 방식의 워크숍이 진행되면 좋겠다. 

워크숍은 대본을 작성하며 참여자들이 보고 겪고 들은 작업과정에서의 경험을 공유하는데, 나는 이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험들은 주위 사람에게 이야기하기 어렵고 모호하며, 이미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 의해서 피해 사실들이 쉽게 왜곡되고 지워진다. 나는 분명히 불쾌한 경험을 했는데, 왜곡되고 지워지면서 불쾌함이라는 감정은 남은 채 더 이상 불쾌한 경험이 아닌 것이 된다. 이건 연극을 하는 작업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다고 여기며 나를 부정한다. 나를 부정하지 않고 내가 겪고 느낀 것이 맞는 감정이라는 것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장이 필요하며, 참여자들과 대본 속 대사들을 한 문장씩 수정하고 터져 나오는 경험담을 나누며 창작자들의 경험들이 공유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워크숍을 진행한 후에 생각난 하나의 문장은 ‘우리에게 빽(back)이 필요하다’ 였다. 그 빽(back)은 피해자가 더 이상 피해자로만 남지 않을 수 있도록 서로의 경험담을 공유하고, 촘촘한 망(기준)으로 그물(규칙)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권력자가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권력을 만드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물고기들이 떼로 모이면 상어가 겁을 먹고 달아날 수도 있지 않을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