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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E: 넌> 2021 프로젝트 보기/워크숍 1차 : 창작윤리

창작윤리워크숍 현장 스케치

2021. 9. 30.

성평등·탈위계 문화조성 사업
첫 번째 워크숍: <창작윤리 워크숍> 현장 스케치

 

기록: 전민정

 

 

‘성평등·탈위계 문화조성 사업’의 첫 번째 워크숍으로 기획된 <창작윤리 워크숍>은 9월 14일 오후 7시부터 9시 45분까지 청년예술청 그레이룸에서 열렸다. 참여 예술가와 함께 창작 과정의 구체적인 상황을 재현해보며 창작윤리의 새로운 기준을 세워 보는 워크숍으로 크게 대본 배포를 기반으로 한 상황 시뮬레이션과 자유 토론으로 구성되었다. (워크숍 소개) 워크숍 참가자는 활동 분야에 상관없이 15명으로 제한해 선착순으로 신청을 받았다. 신청자 중 개인 사정으로 불참한 2명을 제외한 13명이 워크숍에 참석했다. 분야별로는 연극이 9명으로 가장 많았고, 음악, 움직임, 미술 분야의 참가자도 있었다. 전체 워크숍의 기획과 진행은 청년예술청 공동운영위원인 이강호, 김유진, 진저팝 3명이 맡았다. 워크숍의 순서는 아이스 브레이킹, 워크숍에서 지켜야 할 약속 공유, 대본 읽기와 모둠별 공동 창작, 블랭크(BLANK) 대본 공유, 오픈 토크 순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운영진과 참가자들이 이름 혹은 활동명, 활동 분야와 워크숍 참여 동기 등을 간단하게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현재 극단을 운영중인 연출가에서부터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창작자, 아직 학생 신분인 예비 창작자까지 다양하게 섞여 있었다. 평소 관심 있는 분야였고 다른 예술가들의 생각과 창작 환경이 궁금했다거나, 공동 작업 시 다른 창작자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싶다는 참가자가 많았다.

 

 

워크숍에서 지켜야 할 약속

 

자기소개 시간에 이어 이강호 진행자는 건강한 창작환경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에서 기획을 시작했으며, 일상 속에 만연해 있는 위계적·폭력적인 표현을 개선하고, 창작 과정 중 지켜야 할 윤리와 태도에 대해 함께 논의하고 답을 찾아 보고자 한다는 기획 의도를 전했다. 이어서 약속문과 워크숍 규칙을 함께 낭독하는 시간을 가졌다. 첫 번째 토론회에서처럼 ‘평등한 커뮤니티를 위한 약속문’‘창작윤리 워크숍 규칙’을 모든 참가자들이 돌아가면서 읽었다. ‘창작윤리 워크숍 규칙’은 8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었으며 워크숍 특성상 트라우마를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 재현될 수 있으므로 참여자는 언제든 불편한 사항에 대해 논의할 수 있고, 토론 중 서로의 의견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 등이 포함되었다.

 

이후 워크숍 운영진이 현장에서 언제든 참고할 수 있는 매뉴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직접 제작한 국내·해외 사례모음집과 모둠별 활동에 사용할 대본을 참가자에게 전달했다. 국내 사례로는 최근 공연예술계에서 나온 대표적인 규약인 한국공연예술자치규악(KTS)과 민간 단체인 콜렉티브 뒹굴, 극단 신세계, 극단 문 등에서 만든 자치 규약과 지침, 성평등한 무용계·미술계·인디음악계를 위한 행동강령 등이 포함되었다. 해외 사례로는 KTS 제작에 큰 영향을 준 영국 로얄 코트 극장(Royal Court Theatre)의 성희롱·성폭력 및 원하지 않은 성적 관심에 관한 정책(Bullying, Harassment and Unwanted Sexual Attention), 미국 시카고 연극 윤리 규범(Chicago Theatre Standards)과 캐나다 공연예술계를 위한 행동 규범(Canadian Code of Conduct for the Performing Arts)이 들어갔다. (관련 사례 모음집_KTS)

 

 

나였다면 어떻게 말했을까

 

이후 쉬는 동안 각자 자유롭게 대본을 읽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위크숍 진행을 위한 대본은 운영진이 공동 창작한 것으로 지난 2018년 성폭력 예방 교육을 위해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에서 제작해 배포한 소책자 <불편한 연극>(다운로드)을 참고했다. 배경은 대학로의 어느 극장에서 공연을 2일 앞두고 리허설중인 극단이며, 극중극은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로 설정되었다. 등장인물은 연출(남, 40세), 조연출(여), 배우A(여, 21세) 배우B(남, 34세), 배우C(남, 58세)으로 총 5명이다.(대본 보기) 연출이 리허설 중에 갑자기 배우C와 배우A의 스킨십 장면을 추가하면서 벌어지는 상황이 주요 내용이다. 모둠별 활동은 완성된 대본 뒤에 붙어 있는 블랭크 버전의 군데군데 비어 있는 대사를 같이 만드는 것이었다. 참가자들은 모더레이터의 이름을 딴 진저팝 모둠에 6명, 강호 모둠에 7명씩 2개의 모둠으로 흩어져 자리를 잡았다. 먼저 모둠별로 남녀 구분 없이 배역을 정해 대본을 낭독했다. 연극 분야 참가자가 많아서인지, 실제 연극 연습을 하는 듯한 실감 나는 대본 낭독이 이어졌다. 낭독 후에는 대본 속 상황에 대한 각자의 소감을 공유했다. 참가자들은 ‘읽으면서도 불편했다’, ‘배우A가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막내는 죄송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다’, ‘비슷한 상황을 학교에서 많이 겪었다’, ‘저항하거나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등의 다양한 의견을 냈다. ‘스킨십이 꼭 필요한 장면인지 먼저 단원들과 얘기해봐야 한다’, ‘연습시간을 임의로 조정한 것부터 위계로 느껴질 것’이라는 의견도 나왔고, 젊은 여성 배우를 피해자로 한 대본의 설정에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후 블랭크 버전을 다시 낭독하면서 즉흥으로 대사를 만들어 나갔다. 등장인물의 성격에 대해 의논해보기도 하고, 각 인물의 입장을 가정해서 대사를 써보기도 했다. 대사를 읽던 중 빈칸이 나오자 갑자기 말문이 막히면서 침묵이 흐르는가 하면, 참가자가 던진 촌철살인의 대사에 웃음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참가자들이 대사를 만들면서 많이 한 가정은 ‘나였다면 이 상황에서 불편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였다.

모둠별로 열띤 토론이 이어지면서 참가자들과의 합의하에 공동 창작 시간이 10분 연장되었다. 이에 따라 워크숍 종료 시간을 15분 연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사전에 양해를 구했다. 모둠별로 창작한 대본 내용을 공유하는 방식은 자유롭게 정했다. 진저팝 모둠은 최종 발표 시간이 다가오면서 대본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과 공연이 이틀 남은 대본의 상황이 동일하게 느껴졌다면서, 급하게 마무리하기보다는 아무 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창작윤리에 대해 조원들과 못 다한 이야기를 이어가기로 했다. 조영호 참가자는 연출이 부당함에 대해 얘기할 수 없는 분위기를 조성했다면서, “위계는 분위기에서 나온다. 위계는 강압적이거나 공격적인 것만이 아니라 ‘이해하시죠, 괜찮으시죠, 좋은 게 좋은 거죠’와 같은 부드러운 발언에서도 느껴진다. 싫다고 말하면 분위기가 깨지는 상황이거나, 타이밍을 놓치면 말하기 애매한 경우도 많다”는 의견을 전했다. 이어 정고운 참가자는 “위계는 다수와 소수에서 발생한다.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다수가 불편함을 표현하면, 소수의 사람은 그때서야 눈치를 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라는 의견을 덧붙였다. 임기택 참가자는 공동 창작을 하면서 대본과 비슷한 상황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서 “공연 이틀 전에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마지막 장면을 바꾸자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처음의 기획 의도로 돌아가 이야기를 나눈 끝에 결국 바꾸지 않았다”는 경험담을 전했다. 진저팝 모둠은 창작한 대사는 따로 공유하지 않고 토론식 공연으로 마무리 지었다.

 

이어서 강호 모둠은 정리한 대본을 전체 화면으로 공유하고 낭독을 진행했다. 최초 대본 낭독 시에 맡은 배역대로 블랭크 버전 대본을 발표했다. 시간 부족으로 완성하지 못한 마지막 페이지의 대사는 배역을 맡은 참가자가 즉흥으로 얘기하기로 했다. 블랭크 버전에서는 ‘그 말, 저 지금 불편합니다’, ‘근데 이 장면이 꼭 필요한가요?’와 같은 속 시원한 대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우린 프로잖아요? 무대에 서는 것은 배우니까’, ‘일단 해보자는 거 해보고, 살릴지 말지 결정하자’, ‘불편하면 불편하다고 얘기해, 뒤에서 욕하지 말고’와 같은 현장에서 한번쯤 들었을 법한 대사들도 이어졌다. 이후 마지막 즉흥 대사에서 배우B는 “A의 동료 역할로 갈수록 분위기에 동조하게 되었다. 마지막에는 ‘연출님, 그래도 A가 불편하다고 하는데 다시 한번 얘기해보면 어떨까요’라며 A의 편을 들어 주고 싶을 것 같다”고 했다. 배우C는 “60대 배우면 ‘하라면 하는 거지 말이 많아, 그래 가지고 배우 할 수 있겠어’라고 화를 낼 것 같다”고 전했다. 조연출은 “연출에게 조용히 ‘우리 소송 걸리는 거 아니야, 안 할 수 있으면 안 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고 말할 것 같다”고 했고, 연출은 “경험과 전문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감정적이지 않고 이성적으로 ‘너가 프로라면 해야 한다고 강조할 것 같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배우A는 “배우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민될 것 같다. 정말 중요한 것이 지켜지지 않은 것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다.

 

불편하다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

 

마지막으로 모둠별 활동에서 나온 주요 쟁점을 포함해 그간 창작 활동을 하면서 현장에서 느낀 고민 등을 이야기하는 ‘오픈 토크’시간이 이어졌다. 공동 창작을 하면서 생기는 갈등에 대해서는 ‘서로를 이해하고 아는 것이 중요하다’, ‘관객에게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지가 합의되어야 한다’, ‘다른 장르와 만났을 때 언어와 협업의 방식이 달라 충돌이 생기니 이 부분이 잘 조율되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지금 점진적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고 창작 과정에서 덜 윤리적인 인간은 도태되는 환경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희망론도 제시되었다. 반면 위계나 폭력적인 상황을 피해 젊은 창작자들끼리만 작업을 하면서 느낀 아쉬운 점에 대해서도 언급되었다.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나이 든 분들의 경험이 필요할 때가 있고 배울 점이 있는데 아예 배제시키면서 창작의 다양성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일부 참가자는 정작 워크숍을 들어야 하는 나이 많은 창작자는 오지 않고 이미 충분히 고민하고 있는 젊은 창작자만 이 자리에 온 것에 대한 아쉬움을 전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진저팝 진행자는 “내가 나이가 많아지면 오히려 그런 말 때문에 이런 곳에 못 올 것 같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젊은 창작자들도 있다”면서 한 공간에 모인 사람들의 나이를 얘기하는 것도 편견일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참가자도 “성별, 나이로 차별하는 것을 주의하자고 하면서, 어떤 집단을 폄하하거나 몰개성화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서 동의했다. 김유진 진행자는 불편한 것을 얘기할 수 있고 의견을 덧붙여 생산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좋다면서 요즘 SNS에서 화제인 SNL 코리아의 20대 여성 인턴 기자 동영상과 나이와 성별에 대한 이야기는 향후 의제로 발전시키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이강호 진행자는 “불편함을 느낀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창작자가 안전함을 느낄 수 있다”면서 “오늘 다들 비슷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좋은 동료라도 작업 중에는 불편한 상황이 생기기 마련이고, 이를 말하면 다시 불편해진다. 연기만 잘하는 배우, 사람만 좋은 배우 중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남았다는 소감을 전했다. 정해진 시간상 여러 의제를 놓고 충분한 논의를 이어가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 채, 후속 워크숍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며 첫 번째 워크숍이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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